top of page
0.png

나는 왜 이 여행을 하기로 하였나 (Why I took this journey)

((Full version in PDF)

박옥경교수 북한방문기(上)

by 박옥경 | 2018년 4월10일~21일

 

 

북한을 여행 해보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내린 결정이다. 마침 쓰고 있던 제주 해녀에 대한 책도 끝나고 그 다음 단계의 나의 프로젝트는 무엇일까 생각 중이었다. 동시에 급박하게 변해가는 국제 정세와 한반도 정세를 보면서 이번이야말로 놓칠수 없는 역사적인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 개인 생활에서 내가 해야할 일들, 하고 싶던 일들이 다 끝나고, 아이들도 제각기 자리를 잡고 나니 한평생을 뛰어온 셈이다. 이제 남은 내 생의 마지막 자락에 다다라 내 조국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서 일을 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우선 그 땅을 방문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를 보아야한다고 결졍했다.  목욕물에 발을 담그고 온도를 가늠하듯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해야하는 내가 가진 사회인류학자로서의 본능이기도 하다. 

1.jpg
2.jpg

내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50여년 전(1964년) 부모님과 한국을 떠나 처음 4년은 브라질에서 이민생활을 했고, 1968년 캐나다 이민정책이 바뀌어 유색인종을 받기 시작했을 때 부모님과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을 왔다. 첫 해에는 옷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었다. 영어를 잘 못하면서 사무실 일을 한다는 것은 너무 힘들었고 굴욕적이며 서러울 때가 많았다. 나에게 주어진 일 중의 하나가 전화를 받는 일인데 내 영어가 서툴다고 다른 사람을 바꾸라고 할 때는 정말이지 서러웠다. 매일 집에 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그때, 이곳에서 머뭇거리다가는 내 인생이 발전이 없겠다는 생각에 대학에 입학 원서를 냈다. 대학에 합격하고 공장을 그만두려고 하자, 주인은 내가 자기 공장에 머무르면 4년 후에 더 많은 돈을 벌텐데 대학에 가지 말고 자기 공장에서 계속 있으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백만불을 준다고 해도 이렇게 아무 의미 없는 일을 한평생 할 수는 없다고 다짐하며 대학에 가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대학공부가 두 아이를 키우며 박사학위가 끝날 때까지 16년이 걸렸다. 그동안 박사학위 논문자료 수집을 위해서 인도네시아에는 두 번이나 갔지만 내가 나고 자란 한국은 한번도 돌아가보지 못했다. 그 후에도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고국에 돌아갈 기회가 되지 않았고, 어머니가 역이민을 하셔서 한국으로 돌아가셨을 때에야 약 6년간 (2010년~16년) 시간 날 때마다 한국을 방문하며 다시 연결이 되었다. 이것은 내가 은퇴를 한 시점과 겹쳐진다. 

많은 사람들이 한평생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일 해왔는데 나는 이제서야 뒤늦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살아온 삶은 이민으로 한국을 떠나 많은 사람들과 같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새로운 말을 배우고 일을 찾아 경쟁해가며 살았기 때문에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해야할까… 최근에 와서 제주도에 대한 책을 쓰며 한반도의 뼈저린 역사를 새롭게 알게 되면서 이제라도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한민족에 대한 연민(憐愍)의 정이라고나 할까, 한번도 느끼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감정이 내 안에서 솟아올랐다.

한 제주도인이 쓴 ‘통일의 한길에서’ 라는 책에서, 한평생 동안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염원하며 온몸을 바쳐온 저자 고성화씨는 다음과 같이 썼다. “1945년 8.15 해방 후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바라볼 때, 이 나라의 양심 있는 민족성원의 한사람이라면 분단을 극복하고 조국 통일을 위한 일선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렇다면, 조국과 민족을 위해 걸어온 길에서 그로인해 얻어진 성과는 무엇이냐고 자문할 때, 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와 진리에 대한 더욱 성숙한 실천만이 조국과 민족이 자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데 그 의의를 부여하고 싶다” (2004. P. 7). 제주도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책을 통해서 만난 통일투사 고성화씨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 분이 염원하시던 길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통일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내 생각이 나와 가까운 곳에 사는 캐나다-조선 연합회 회장님을 만남으로서 구체화 되어 이 여행을 하게 된 하나의 동기가 되었다. 이 분은 처음에는 누나를 찾기 위해서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고 지금은 그 누나의 자식들(조카)들을 보러 매년 두번씩 북한 여행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어렵게 사는 조카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신이 즐기던 골프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골프에 쓰는 돈을 아껴서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도와주기로 한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그 분을 다시 보게 되었다. 동지애를 느꼈다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나도 이런 결정을 여러번 하기는 했다. 살던 집의 부엌을 새로 고치는 것보다는 이제 막 새로 가정을 갖는 자식들을 도와준다던지, 살고 있던 집을 팔아 이익을 나누어 두 아이들이 집을 사는데 보태주기로 한 결정 등이다. 딸아이는 “엄마, 그렇게 해도 괜찮아? 내 친구 부모님들은 그런 돈이 생기면 세계 여행을 하려고 하던데…” 했다.  내 자신의 편안함보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갖는 생활을 우선하면 사는 방식. 이것은 가정에서 시작해서 사회생활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번 여행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은 참으로 나에게는 행복하고 흡족한 일이었다.

 

이번 여행은 북한의 국가적 행사와 겹치는 것 같다. 4월 중순은 김일성 주석의 생일을 축하하는 명절(태양절이라고 부름)이고, 9월9일은 공화국이 탄생한 명절이다. 2018년 올해는 공화국 건설 70주년 기념일이라 큰 행사가 있을 것이라고 들었다. 나는 9월 행사에는 갈 수가 없지만  4월 행사에는 회장님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내 한평생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따라서 하는 여행이다. 이 여행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3.jpg
4.jpg

4월 12일 평양도착

 

몬트리얼-북경 여행은 12시간이 걸렸다. 북경에 오후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연결되는 비행기가 없어서 하루밤을 자야 했다. 북경 공항에서 북조선 참사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참사의 차로 시내에 들어와서 영사관 가까운 호텔에 들었다. 북경에 도착할 때부터 언제나 참사 아니면 안내원이 우리를 동반했다. 다음날 아침 북경 주재 북한 영사관에 들려 미화 90불을 내고 비자를 받았다. 그리고나서 참사의 차로 공항으로 가서 고려항공을 탔다. 고려항공은 유일한 북조선 항공사인 것 같았다. 많은 외국인들이 비행기안에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전부 ‘태양절’에 참석하는 사람들이었다. 

 

약 두시간 후에 평양에 도착하니 몇명의 간부들이 우리를 마중하기 위해서 나와 있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정부의 ‘해외동포 원호 위원회’에서 일하는 분들이라고 했다. 부국장, 참사, 우리를 안내할 안내인과 운전사 그 외에 에드몬튼에서 온 캐나다 동포 한분도 나와 있었다. 우리들을 위한 환영은 아주 깍듯하고 정중했다. 이것이 북조선의 손님을 맞는 방식인 것 같다. 

  

우리 일행은 모두 초대소 ‘Guest House’ 라는 곳으로 갔다. 보통은 태양절 3일 동안은 고려 호텔에서 묵고, 그 다음에 초대소를 가거나 다른 호텔로 가는데 이번에는 중국에서 온 200 명 예술단이 고려호텔을 통째로 쓰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직접 초대소롤 들어가는 것이다. 초대소에 도착한 후 해외동포위원회(해동) 부국장이라는 분과 캐나다 대표 세 사람이 간단히 면담을 했다. 제각기 자기 소개를 하고 난 후, 우리의 일주일간의 일정을 알려주었다. 이 일정의 절반은 방문전에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방문하고 싶은 곳을 쓴 리스트를 참고한 것 같다.

     

 

                                                                          13일 (금요일) 아침: 강의

                                                                          14일(토) 아침: 중앙 보고대회- 대동강 외교관에서

                                                                          15일 (일) 아침 9시: 태양궁전 방문

                                                                          아침 11시: 새로생긴 대학 방문 (유치원과 국민학교선생 교육)

                                                                          오후 3시: 해외 동포 (중국, 일본) 예술가 공연 관람

                                                                          저녁 9시: 만찬

                                                                          16일 (월) : 카나다 소식 좌담 § 중국 고전 발레          

                                                                          17일 (화) 오후: 제일 에술단 단독공연

                                                                          18일 (수) 오전 : 북조선에 샤는 가족 만나기, 외할아버지 묘 방문

                                                                          19일 (목) 아침: 자유행동 (백화점, 통일시장…방문)                    

                                                                          오후:  소년 어린이 궁전 방문

                                                                           20일 (금): 사회 과학원 교수 강의 (민속학, 주체사상)

8.jpg
6.jpg
5.jpg
7.jpg

초대소

 

초대소는 일종의 국영 손님의 집이다. 돈을 내지 않아도 되지만, 좀 시내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문제이다. 초대소에 묵으면, 언제나 안내원과 동반을 해야 한다. 택시도 탈수 없고 아무나 들어올수도 없는데 노동당원, 그것도 참사 정도 직위의 사람만 들어올수 있다고 했다. 건물시설과 음식은 호텔 못지않게 좋았다. 방마다 shower와 목욕탕이 붙어있고, TV를 비롯해서 가구들도 아주 좋았다. 면담실(회의실)을 비롯해서 2층에는 탁구시설도 있고 각 침실에 있는 책장에는 북조선에서 출판된 책들이 백여권이나 꽂혀 있었다. 그중에서 한 열권 정도 가지고 왔다. 침대머리위에 붙어 있는 목련화 그림은 참으로 정겹게 느껴졌다. 목련은 북한의 국화(國花)라고 한다. 침실에서 보이는 아침의 동트는 광경도 모두가 고향의 친정집에온것같은 편안한 느낌을 준다. 참으로 이상한 감정이다.

 

 

 


 

 

초대소에는 3명의 여자 동지(33살, 23살, 18살)가 살고 있다. 두 사람이 안에서 식사준비를 하고, 제일 나이어린 동지가 테이블에 써브를 했다. 우리가 그곳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총련 (재일본 조선인) 호텔쪽으로 산책을 갈때도 이 여자동지 한 사람이 언제나 동행을 했다. 그리고 바깥일을 보는 한 남자 동지와 문앞에 ‘또또’ 라고 부르는 집을 지키는 큰 개가 한마리 있어서 사람이 들어오거나 나갈때마다 짖어대는데 북조선에는 도둑도 없는데 왜 개가 필요한지 물으니 간첩이 들어올까봐 개를 키운다고 했다. 

 

초대소에 도착하니 위에서 말한 제일 나이 어린 동지가 건물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몸을 거의 90도로 굽혀 인사를 했다. 매일 들어오고 나갈 때에도 이렇게 인사를 하고 집안에 들어서서 구두를 벗으면 나갈 때 쉽게 신을 수 있도록 구두를 돌려놓아주었다. 조그마한 제스쳐이지만, 그리 작은 일이 아니다. 북조선사회의 교육과 가치관을 보여주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초대소에는 뉴질랜드에서 온 분과 캐나다 에드몬튼에서 온 분이 묵고 있어서 우리 일행 둘을 합쳐서 4명의 손님이 있는 셈이다. 뉴질랜드에서 온 분은 젊은 사람인데 책을 쓰기 위해서 일년에 서너번 북조선에 온다고 했다. 그 분은 ‘조선 통일의 기둥’이 되기 위해서 일 한다고 했다. 많은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통일은 너무 비용이 비싸서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장한 생각인가! 또 한분 에드몬튼에서 오신 분도 지난 20년 전부터 자주 오는데 자신을 ‘민족주의자’라고 불렀다. 빨갱이가 아니라 민족주의자, 민족과 조국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반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며 민족주의자를 남쪽 사람들은 빨갱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 분은 북조선의 땅이 너무나 허허벌판인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2005년에 자신의 재산을 전부 청산해서 약 1억그루의 나무를 북한에 심었고 그 공로로 2012년에 훈장을 받았다고 했다. 이 일을 하기 시작한 동기는 마치 조국의 부름 같았다고. 어느날 갑자기 누가 자기를 부르는 것 같아서 잠에서 깼는데 그 부르는 사람이 ‘조국’ 이었다고 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전에는 만난 적이 없었다. 내가 이 길로 들어오니 민족주의자, 통일의 기둥 등을 만나는 것 같다. 이 세상과 여기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내가 이제껏 살아온 세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9.jpg

13일 강의가 취소되었다고 전화가 왔다. 우리 그룹의 안내원이 여러가지로 준비할것이 너무 많아서, 오늘은 그냥 쉬는게 좋겠다고 전해주었다. 북조선에서 우리는 전화와 인터넷을 쓸 수가 없다. 모든 연락은 안내원이 초대소로 전화를 해서 우리에게 전달이 됐다. 나중에 알게된 것이지만 내가 캐나다로 돌아가도 북조선 사람과 인터넷으로 연결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단지 내 이메일 주소가 내가 연결하고 싶은 사람과 기관에 등록이 되어있어야 한다고. 

 

이날 하루는 초대소에서 쉬면서 다른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되었다. 캐나다 에드몬튼에서 오신  WB 선생은 노래를 아주 잘했다. 식당을 겸한 가라오께 방에서 이런 저런 노래를 불렀는데 너무 감동적이었다. 동지가 부르는 노래, 월미도 전쟁(인천상륙)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나는 알았네’ 를 들으면서 북조선 사람들의 정서(情緖)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조국의 품, 장군님의 품, 어머니의 품은 같은 뜻이며 한없이 그립기만 한 마음이었다. 사랑의 노래인데 사랑의 대상이 장군님, 조국 어머니인 것이다. 문득 내 친구가 즐겨듣던 이집트의 사랑의 노래가 생각났다. 이집트 사랑의 노래는 모두가 ‘신’에 대한 사랑인데 이성에대한 사랑일 수도 있다. 이런 장군님에 대한 사랑을 바깥 사람들은 우상숭배(Personality cult) 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노래 한 부분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500년대부터 (조선반도, 일본, 서양에서 ) 만들어진 지도는 독도가 조선 반도에 속한다는것을 보여주고 있다

10.jpg

나는 알았네

-----------

 

아.. 내 고향

 

그려 보는 곳

살아도 그 품 속

죽어도 그 품 속

 

아……. 내 고향

들꽃 피는 그 언덕이

 

둘도 없는 조국인 줄

나는 나는 알았네

 

살아도 그 품속에

죽어도 그 품 속에

 

언제나 사무치게

불러 보는 곳

 

아….. 어머니라

부르는 나의 조국이

 

장군님의 그 품인 줄

나는 나는 알았네

-----------

 

<中편 계속>

글 사진 | 박옥경 몬트리올대 객원 연구원 / 사회인류학자

bottom of page